아버지와 나

아주 오래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 나갈 길은 강자가 되는 것 뿐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난, 창공을 날으는 새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내 남자로서의 생의 시작은 턱 밑의 수염이 나면서가 아니라
내 야망이, 내 자유가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이 된다는 것.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섭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그 두려움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였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후에,
당신이 간 뒤에, 내 아들을 바라보게 될 쯤에야 이루어질까.
오늘밤 나는 몇 년 만에 골목길을 따라 당신을 마중 나갈 것이다.
할 말은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둔 채
우리 두 사람은 세월 속으로 같이 걸어갈 것이다.

버틀란트 러셀 作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中

종교의 기반은 두려움이다.
종교의 일차적이고도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 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그 모든 것의 기초다. 신비한 것에 대한 두려움, 패배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두려움은 잔인함의 어버이다.
이 세계를 사는 우리는 과학의 도움으로 이제야 사물을 좀 이해했고 어느 정도 정복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과학이 기독교와 교회에 맞서 또한 모든 낡은 교훈에 맞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어렵사리 전진해 온 덕분이다.
과학은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우리의 마음도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본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후원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늘에 있는 후원자를 만들어내지 말고, 여기 땅에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해 이 세상을, 지난날 오랜 세월 교회가 만들어 놓은 그런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자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로 서서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세상의 선한 구석, 악한 구석,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는 말자. 세상에서 오는 공포감에 비굴하게 굴복하고 말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교회사람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며 끔찍한 죄인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저럴 수 있을까 하는 경멸감마저 든다.
우리는 굳건히 서서 이 세계를 진솔하게 직시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바라던 만큼 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세상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지식과 온정과 용기가 필요하다. 죽어버린 과거만 돌아보고 있을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의 지성이 창조할 미래가 죽은 과거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훌륭한 삶의 구성 요소로서의 지식을 언급할 때, 나는 윤리적 지식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 및 특수한 사실들로 된 지식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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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作 < 바보같은 사랑>

돌이켜보니, 사랑에는 기다리는 일이 9할을 넘었다.
어쩌다 한번 마주칠 그 순간을 위해 피를 말리는 기다림 같은 것.
그 기다림 속에서 아아 내 사랑은, 내 젊음은 덧없이 저물었다.
하기야 기다리는 그 사람이 오기만 한다면야 어떠한 고난도 감내할 일이지만
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던 우직스러움.
그래, 사랑은 그런 우직한 사람만 하는 거다.
셈이 빠르고 계산에 능한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척 얼굴만 찌푸리고 있지 잘 살펴보면 언제라도 달아날 궁리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 사랑은 그런 우직한 사람만 하는 거다.
남들은 미쳤다고 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대가 오기 전까지는 결코 한 발자국도 떼지 않는 미련한 사람들.
그래, 사랑은 그런 우직한 사람만 하는 거다.
모든 걸 잃는다 해도 스스로 작정한 일,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제 한 몸 불태우는 단풍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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