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한국 가톨릭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인 황상영이 1801년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기도한 밀서.
1801년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의 배론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한 후 토굴에 숨어서 자기가 겪은 박해상을 기록했다. 이때 박해를 피해 배론까지 찾아온 황심을 만나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도를 상의한 끝에 박해의 경과와 재건책을 길이 6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에다 적었다. 한 줄에 95~127자씩 121행, 도합 1만 3,311자가 깨알같이 적힌 이 백서를 옥천희에게 주어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9월 20일(양력 10월 27일)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ㅇ이 9월 26일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 백서는 압수되고, 황사영 자신도 29일 체포된다.
백서의 내용은 1785년(정조9년) 이후의 교회 사정과 박해상,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과 순교자들의 약전(略傳),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죽음에 대한 증언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내용은 폐허가 된 조선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 군대를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해달라는 내용등이다. 백서를 읽고 대경실색한 조선 조정은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하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더 강화했다.
황사영 백서 원본은 압수된 뒤로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떄 우연히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 주교의 손에 들어가, 1925년 한국순교복자79위의 시복식 때 로마교황에게 전달되어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에 대해 문규현 신부는
민족의 이익을 배반해가며 지키는 교회의 의미를 묻는다.